노동사건과 사람들

명백한 과로도 상상할 수 있게! 열악한 북한의 근로조건과 응급의료환경, 뇌출혈 발병 및 악화에 기여

페이지 정보

작성일16-05-27 18:09

본문

                                                                                                   법무법인(유) 한결  공인노무사 정 경 심

 

 

명백한 과로도 상상할 수 있게!            

열악한 북한의 근로조건과 응급의료환경, 뇌출혈 발병 및 악화에 기여

 

 

한달에 한번 휴무했어도 과로 아니다?

 

    이 사건은 1심에서 원고가 과로하고 스트레스 받은 사실을 무척 자세하게 변론하고 입증했지만 안타깝게도 덤벙거리는, 혹은 건조하기 짝이 없는 판사를 만나 1심에서 패소한 것처럼 보였다. 항소심을 의뢰받고 기록을 검토해 보니, 질 이유가 별로 없는 사건이었다(이런 사건도 드문데...). 다른 곳에서 패소한 사건의 2심이나 3심을 맡으면 왠지 어깨가 더 무거워지기 마련... 원고는 2007. 8. 24. 북한의 금강산지구 골프장 레저시설의 공사현장에 일용잡부로 채용되어 일하다가 9. 22. 아침 숙소에서 뇌출혈이 발생해 그 상병을 산재로 인정받기 위해 분투 중이었다. 그는 식물인간이 되었으니 그의 가족이 갖은 고생을 하고 있었다.

 

    원고는 이 공사현장에 채용되어 쓰러지기 전날까지 28일 동안 매일 10시간씩 단 하루만 휴무한 채 소위 ‘노가다’를 계속했었다. 건설공사 현장은 다른 곳보다 근로시간이 많고 휴일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무리 열악한 곳도 2주에 한번 1, 2일 정도는 쉬는 것이 보통인데, 입이 떡 벌어지는 일이었다. 1심 판결문은 그러한 근로시간과 휴일 실태를 친절하게 표로 보여주고 있었고, 원고를 비롯한 인부들의 숙소에 처음에는 화장실과 샤워시설이 없었던 사실, 비오는 날에 우비가 찢어져 비를 맞으면서 작업을 한다는 사실도 기재되어 있었다. 이런 이런... 국내에서는 좀처럼 있을 수 없는 근로시간과 작업조건인데...

 

    그러나, 1심 판결은 원고가 거의 휴무도 없었고, 비를 맞으면서 작업하기도 했으며, 숙소 등이 열악했다는 점을 다 인정하면서도 “①원고가 수행한 업무는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건설근로현장에서 하는 보통인부의 업무이고, 거의 연장근무를 하지 않은 점, ② 원고가 2007. 4. 12.부터 6. 12.까지 이 사건 공사현장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 이 사건 공사 현장의 낯선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점, ③ 원고는 이 사건 상병의 위험인자인 고혈압과 당뇨병이 있었고 흡연을 계속하였으며.... 상병이 원고의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로 인하여 발생하였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며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을 내렸다.

 

상대적 과로 판단의 맹점, 상상력 부족한 재판부

 

    재판부가 귀신에 홀리지 않고서야 이걸 보고 과로가 아니었다고 버젓이 판결문에 올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귀신이란 과로를 상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궤변과 비논리이다. 근로기준법상 기준근로시간이 하루 8시간이고, 1주면 40시간인데, 하루에 꼬박 10시간씩 일한 것이 과로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이건 바로 시간외근로나 휴일근로가 많더라도 그런 근로를 계속 해 왔다면, 또는 동료들도 같이 그렇게 일을 하고 있다면 과로가 아니라는 궤변에 홀린 탓이다. 실제 피고인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이 사람은 하루에 10시간씩 하는 것이 통상근로였기 때문에 10시간만 근로한 것에는 연장근로가 없다고 주장했고, 재판부는 용감하게도 그 주장을 판결문에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물론, 과로를 했는지의 판단에는 시간상 비교나 동료들과의 비교도 필요하지만, 절대적 과로 기준을 놓쳐서는 안된다. 근로기준법이 있는지도 몰랐던 전태일의 시절 청계천 다락방 소녀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씩, 한달이면 1, 2번 밖에 쉬지 못하면서 일했었다. 당시는 모든 소녀들이 다 이렇게 일하고, 그것은 1년 사시사철 동일한 환경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과로하지 않았다고 말은 못할 게다.

 

   원고에게 절대적인 과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냉철함을 잃고 상대적 과로 주장에 홀린 것은 결국 재판부의 상상력이 제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판사가 노동 현장을 알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사자가 주장하고 입증하는 근로시간, 근로조건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는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산재 사건 변론을 할 때 “영화를 찍어라!”라고 한다. 영화는 아니어도 다큐는 찍어야 한다. 1심에서는 원고가 과로하고 스트레스 받은 많은 사실이 주장되고 입증되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것 때문에 원고는 어떤 고통을 받았을 것인지, 판사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주지 못한 것 같았다.

 

    항소심에서 우리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했다. ▼원고는 원래 문방구를 하던 샌님이었는데 문방구가 잘 안돼 북한에 오게 됐다(샌님이 노가다 하니 얼마나 힘들겠나). ▼처음에는 골프장 잔디 까는 업무만 2개월 하다가 다시 왔는데 제일 힘이 드는 건설공사 인부로 배치받았다(이런 일은 처음이야). ▼북한에는 망치나 곡괭이도 모자라 돌맹이도 연장으로 쓴다(북한의 열악한 작업조건) ▼28일간 271시간 근로했다(근로기준법 기준은 4주간 160시간 근무다) ▼우비를 입어도 땀과 비에 젖어 맑은 날보다 2,3배 힘이 든다(비오는 날 일해 본 적 있어?) ▼한번도 간식을 준 적이 없었고 식수도 먼 곳에 있었다(노가다 하는데 삼립빵과 우유, 아니면 막걸리도 안준다고?) ▼냉장고, 티브이. 선풍기, 세탁기도 없는 숙소(남한에선 이런 조건이면 안가죠) ▼현장에도 철조망이 쳐져 있다(금강산지구라는 게 실감나지 않는가?). 판사님, 상상해 보세요!!

 

항소심서 북한 현장 특유의 열악한 근로조건 인정돼

 

    더구나, 다른 인부들이 모두 작업을 하지 않은 9. 18.에도 원고만 반나절 작업을 한 사실은 도통 막노동을 해보지 않은 원고의 고충을 잘 드러냈다. 같은 인부 하나가 9. 14.부터 일이 너무 힘들다며 일을 그만두고 회사와 당국의 허락이 떨어지면 남한으로 가려고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날이면 날마다 술만 마시다가 숙소에서 그만 쓰러졌다가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인부들은 회사의 무관심과 방치, 응급진료 시스템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점(위세척만 제대로 했더라도 생존할 수 있었다) 등이 너무 안타까워 자연스럽게 스트라이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한에서 보낸 시멘트가 도착하자 회사에서는 샌님인 원고와 또 다른 한 사람에게 시멘트 하차 작업을 시켜 원고는 동료를 제대로 애도도 하지 못한 채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원고의 핸디캡은 평소 고혈압과 당뇨병이 있다는 점이었다. 피고는 원고의 뇌출혈이 이와같은 기존증이 자연경과과정에 의해서 악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거기에다 회사가 오히려 원고를 도와주는 일을 저질렀는데, 원고의 요양신청을 방해했던 회사는 원고가 2년 전에도 뇌출혈로 반신마비를 겪었고, 사고 전전날에도 과음으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허무맹랑한 내용의 보고서를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것이었다. 그러나, 건강보험 기록에 이런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는 원고가 꾸준히 약복용을 하고 있었고 아무런 건강상 이상이 없다는 점을 차분히 주장할 수 있었다.

 

    1심에서는 쟁점이 되지 않았던 또 하나의 논리는 원고가 쓰러진 직후 북한에서 받았던 응급의료의 내용이 너무나 열악한데다가 남한으로 후송되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원고의 상병이 악화되었다는 것이었다. 북한이라는 특수한 근로환경으로 야기된 문제이니만큼 그 조건은 상병과의 인과관계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실제 원고는 06:25 마비 증세가 와서 동료가 회사 관리자에게 연락하였으나 07:40이 되어서야 금강산병원에 후송되었고, 70대의 의사 한명만이 상주하는 이 병원에서는 포도당, 혈압강하제 주사와 산소마스크 착용만을 할 수 있었고, MRI나 CT 촬영 조차 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귀경 절차도 복잡해서 09:30에서야 앰블런스 후송이 시작되었고, 10:20 남북출입국사무소에 도착했으며, 복잡한 수속을 거쳐 11:30 속초병원, 12:17 강릉아산병원에 후송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병원들을 거치는 동안 원고의 혈압은 계속 떨어져 처음 금강산병원에서의 혈압은 150/90mmHg이었으나, 강릉아산병원에서는 183/97mmHg로 상승하게 되었다.   

 

열악한 치료조건과 시간지체도 업무환경으로 인정

 

    과연 처음 발병한 업무상상병 또는 업무외상병에 대해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하거나 치료가 지연된 점을 법원에서 어떻게 평가해 줄 것인지 궁금했었는데, 다행히도 법원은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주었다. “진료기록감정의의 의학적 소견에 의하면, 고혈압, 당뇨 외에도 스트레스, 과로 등 혈압과 관련된 위험인자가 이 사건 상병의 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뇌출혈의 발병 후 최대한 빨리 치료할수록 뇌손상의 가능성과 정도가 줄어들 수 있는데, 원고의 경우 이 사건 상병의 발병일에 속초병원과 강릉아산병원에서 순차 행하여진 뇌 전산화 단층 촬영 결과를 비교해 보면 시간이 갈수록 증상이 악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 점에 비추어 빠른 처치를 하였다면 뇌손상의 정도는 줄어들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는 점, 이 사건 공사현장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원고가 적절한 수술적 처치를 받을 수 있는 의료시설이 갖추어진 병원에 전원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경과된 점을 종합하면, 이 사건 상병은 원고가 기왕에 보유하고 있던 뇌출혈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인자 외에도 원고의 건강과 신체조건에 비추어 볼 때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됨으로써 혈압의 상승이 초래되어 발병하거나 기존 질환이 자연적인 진행 경과 이상으로 급격하게 악화된 것이라고 봄이 상당하고, 여기에 이 사건 공사현장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뇌출혈에 대한 치료가 상당한 시간 동안 지체된 결과 뇌손상의 정도가 악화되었다고 보이는 사정까지 아울러 고려하면, 원고의 업무와 이 사건 상병 사이에는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1심에서 쉽게 과로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원고의 가족들, 그 중에서도 소송 내내 발벗고 뛰었던 원고의 형은 이 사건의 일등공신이었다. 뇌출혈로 식물인간이 원고와 제수씨를 대신해 동료들에게 일일이 확인서를 받고, 증언할 동료를 우리 사무실에 불러와 주고, 소송에서 쓸 논리를 깨알같이 정리해 주기까지 했다. 자신이 정리한 논리와 사실관계가 중요하다고 미주알고주알 주문은 많았지만, 우리가 정리한 서면을 감수(?)한 다음에는 일체 우리를 신뢰하고 적극 지원해 주었다. 

  

    공단이 상고를 했지만, 다행히 상고 기각으로 사건은 끝났다. 원고는 그 동안 삶과 죽음의 고비를 몇 번씩 넘었지만 아직 식물인간으로 삶을 계속한다. 이런 혹독한 겨울이라면 봄은 절대 오지 않을 것만 같기도 하다. 원고의 삶도 그럴 것인가.